★로마제국의 삼두정치(BC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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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그누스 폼페우스,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원로원들 몰래 비밀협약체결 크라수스가 주장하는 세금감면과 폼페우스가 주장하는 병사들에게 토지분배 카이사르가 집정관이 되면 두가지 법안을 원로원에서 통과시킨다.는 협정을 이들 셋은 비밀협약을 한다.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두법인 통과시키기 위하여 원로원들에 안건을 상정했으나 부결된다. 폼페우스와 크라수스의 독촉을 받고 카이사르는 반대한 원로원들을 폭력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고 법안을 통과시킨다. 그 후 원로원들은 “생각이 다른 사람에서 무슨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 으로 인식되면서 원로원들로부터 멀어지면서 카이사르에게 위기가 닥친다.

    폼페우스와 크라수스는 카이사르가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카이사르를 집정관에서 물러나게 한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에서 물러난 이후 독자적으로 갈리아 정복길에 오른다. 그는 전쟁의 신답게 연전연승으로 영토를 넓혀나간다.

    그의 전투일기 [갈리아전기] 로마에 전한다. 로마시민들은 새로운 영웅탄생에 기쁘하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기병장교)가 군사들을 데리고 합류한다.

    카이사르는 프랑스와 북유럽일부정복하고 마지막 한곳만 남은상태에 분열된 갈리아 부족장 중 한명인 “베르킨케토릭스” 군대에 참패 당한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보급로를 차단한다. (초토화작전) 그 사이 흩아져 있던 갈리아 부족들이 연합해 25만 대군과 카이시아군은 맞서게 된다.

    카르시아 베르킨게토릭스


    로마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며 삼두정치의 한명인 크리수스는 두사라과 비교할 때 부족한 경력을 쌓기위해서 시리아정복길에서 참패당하고 포로로 잡혀 금녹인물로 살해당한다.

    카르시아가 정복을 끝내고 로마 귀한을 한다. 로마의 집정관인 폼페우수스는 새로운 영웅으로 귀한하는 카이사르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원로원들은 만장일치로 카르시아를 기소하기로 결정한다.

    한때 카르시아의 연인 세르빌리아 아들 브로투스도 원로원 한명중이다. 그도 카르시아를 기소하는데 동의했다. 그는 자라면서 카르시아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어머니의 조언-승자의 편에선다.)

    카이사르는 로마 외각 320키로지점에서 원로원 소환통지를 받는다. 그리고 유일한 상속자 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께…

    카르사아의 두가지 선택지?

    “루비콘 강이 건너지말라!.”
     
    이탈리아북부 로마국경계 침입자가 되는길(로마군대로 로마를 치는것)
    혼자들어가 기소되어 추방되어 지역총독으로나가는 것
     
    이 떼 돌아갈 길어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용어 “루비콘강을 건너지말라.” 생겼다.
     
    폼페이수스는 원로원들과 함께 로마를 떠나 그리스에서 전략을 수립하기로하고 로마를 떠난다.
     
    로마는 무정상태다.
    거리의 불량배들이 로마를 장악
     
    그는 비어있는 로마로가자는 부하들의 의견을 단호히 거절하고 진로를 변경한다. “브룬디시움”을 향한다.
     
    브룬디시움(남부해안도시) 폼페이수스는 320km앞서 있다. 3개월을 밤낮으로 행군을 강행한 가르시아 군대가 도착하는 날 폼베우스는 해안을 떠난다.
     
    카르시아는 2개월동안 배를 만들어 그리스 “파르살루스” 당도한다. 1진 1만의병사와 함께ᆢ
     
    둘은 10년만 파르살루스전투 앞두고 폼페우스의 제안으로 조우한다.
    카이사르는 아나가 죽고 유일한 혈육 딸을 집정관이 되면서 폼페우스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그 딸이 아이을 낳다가 죽었다.
    유일한 후손인 딸이 죽으면서 낳은 아이가 딸이였는지 아들이였는지 폼페우스에 게 묻는다 새폼퍼이수스는 아들이였다. 한다.
     
    파르살루스전투
    폼페이수스 와 카르시아
    병력은 45000대 22000명
    승부는 한시간 만에 카르시아의 완승리로 끝나고 폼페우스는 이집트로 도망간다.
    부관인 안토니우스 로마로 보내고 그는 폼페우스로를 잡으려 이집트로 추격한다.
     
    당시 이집트 왕 테오스 필로파토르 (14살) 도망온 폼페우스를 죽인다. (카이사르의 분노)
    폼페우스 잡기위하여 당도한 카르시아도 이집트왕에게 붙잡혀 알렉산드리아인질(BC48) 인질로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클러오파트라

    클레오파트리와 만남(BC 47)
     
    카르시아 의 전략으로 알렉안드리아포위작전 펼치며 승리한 클레오파트라가 이빕트 왕권작악하고 둘은 연인관계 된다.
     
    12년만에 귀환 로마는 혼돈의 도시가 되어있다.(BC46년)
     
    당시 로마를 통치하고 있었던 카르시아의 부관 안토니우스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였다.
    폭력으로 시민들을 다스리면서 100명의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 죽였다. 그는 매일 술과 여자들과 함께 지내고 동생에게 로마를 맞겼다.
     
    다시 돌아온 카르시아는 원로원들을 다시 모아놓고 그들을 설득한다.
     
    그리고 10년 독재집정관이 되어 로마를 안정시킨다.
    그리고 그는 권력에 도취되어 원로원들 앞에서 영구집정관선언하는 그의 지병인 발작이도 잦아든다. 그동안 측근 몆명외 몰랐던 그의 지병을 원로원들이 알게된다.
     
    영구독재 집정관이 된 후 그는 원로원들이 딴생각을 못하도록 그의 특기를 살려 정복길을 나서기로 한다. 정복길을 나서기 하루전 날 원로원들(브루투스주도)에게 통보하는 자리에서 그는 23번의 칼을 맞고 피살된다. (BC 44. 4.13)

    카르시아의 죽음

    다시 로마는 혼돈의 도시가 된다.
     
    그 후 “안토니우스”와 “브루투스” 권력투쟁이 전재된다. 그리고 카르시아의 양아들 울리우스 카르시아는 분노를 감추고 원로원들과 타협하며 조용히 힘를 기른다.
     
    카르시아 사후 20년 “옥타비우스 울리우스 카르시아”가 로마제국 1대 황제가 탄생된다.
     
    그가 로마제국 5대성인 중 한명인 존엄한 자 칭호를 원로원들로부터 부여받은
    “아우구스투스” 시저가 탄생되었다.

    로마국립박물관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그스투스로 태어났다.
    그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원로원들에게 살해당한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다져 놓은 로마를 반석위에 올려 놓는다. 그후 로마는 200년이 넘도록Pax Romana시대를 지속하게 된다.

    카이사르 암살은 직접 공화국 정말로 이어졌으며 황제 독재 정치가 시작더ㅣ는 동기가 되었다,. 그는 부패 억제를 위한 조처를 통에 빚을 없애고 가난한 서민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하였다. 그래서 서민들은 그를 따랐다. 그의 명성은 국경을 넘아 러시아 “차르” 독일의 “카이저”가 카이사르를 자국으로 번역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7월 “줄라이” 그 이름을 기려 명명했다.
    그는 서양 역사상 위대한 실촌 인물 2~3인 중 한 명이다.
    지난 2000년 동안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지도자들은 카이사르를 알게 모르게 자신을 가이사르와 비교했다. 서양식에서 전 세계의 정치와 군사, 역사에 크나큰 비중을 차지한 그는 2천년전 불꽃처럼 나타나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갔다.

    당대 최고의 여걸 카르시아 연인 세르빌리아(브루투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