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몰래하는 명상

    0
    83

    김윤기/ 로스안젤레스 (기프트서울 미주통신원)

    사 진: 단월드 홈페이지


    “세상과 내 과거, 미래와 생각들을 버린다. 생각을 놓을 때라야 나는 실존할 수 있다.” 아내에게는 다툴 때마다 내게 사용하는 초전박살용 단골 무기가 있다. 내겐 희미하지만 그녀에겐 또렷한 내 과거 잘못 들추기다. 내게 죄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마치 기독교에서 사람들에게 원죄니 뭐니 해서 죄의식을 갖게 해서 말 잘 듣는 착한 신자를 만들려는 것처럼. 그러던 아내가 최근에는 색다른 무기를 들이댔다.

    그렇게 화를 내는 사람이 명상은 왜 해!”

    어럽쇼, 명상을 한다면 묵묵히 입 다물고 있어야지 웬 말대꾸에다 화까지 내느냐는 의미일까. 깨달음을 얻고 구원 받는 것이 내 삶의 궁극 목표이긴 하지만 아직 그 근처에도 못 가본 내게 아내는 턱도 없는 무리한 바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전문직을 갖은 아내는 나 보다 돈을 많이 벌었다. 조그만 광고 사업을 하면서 집에 가져다주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한 액수는 최대 가능성의 내 자존감이었고 약속한 날짜를 지키려 방방 뛰었지만 늘 역부족이었다.

    아내는 집의 정원 가꾸기나 수리 등은 물론이고 수입 지출의 재정, 하다못해 자식 교육까지도 나를 배제한 채, 과부도 아니면서 꼭 과부처럼 혼자서 꿋꿋하게 잘도 해나갔다. 내 구두나 양말, Y셔츠, 양복 등을 미리미리 사다놓는 바람에 내 손으로 살 필요가 없었다. 아내는 알뜰히 나를 양육(?) 하듯 바라지를 했고 대신 집안에서 내 무료와 무력함은 무럭무럭 성장해갔다. 그렇게 비밀처럼 세월은 말없이 흘러갔고 그 세월이란 놈이 이제 바다 저 끝에 노을로 피어날 때 쯤 나는 어느 은퇴의 항구에 닻을 내리고 정박했다.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가 있지만, 이제 노래와는 거꾸로 아내는 아직도 쌩쌩하게 항구를 들락날락 하는 배였고 나는 항구 같았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 무슨 만남과 이별이 다반사인 항구와 배 같은 숙명적 눈물 섞인 애틋한 사랑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항구를 떠나지 못하는 나는 바다나 드넓은 우주가 점점 그리워지고 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내 스스로가 궁금해서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스스로를 모르는데 그 모르는 스스로에게 스스로가 누구냐고 묻다니—. 어찌 답이 나오겠는가. 소크라테스도 끝내 못 찾았던 것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답을 찾아낸 여럿의 성인, 성자들이 있지만 그분들 중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는 어려운 숙제를 준분도, 생겨난 것은 사라지고 세상만물은 모두 공空한 것이라는 심오한 가르침을 남긴 분도  가버렸다. 나는 그 두 분이 남긴 숙제와 가르침을 공부해 지식으로 알려고 하기보다 열심히 수행, 따르려고 애쓴다. 언젠가 나도 답 찾고 성자가 될 수 있을지 누가 알랴.

    내 명상의 편력은 ‘참나’를 찾고자 시작되었다. 명상은 깊디깊은 내면에서 신성神性이나 불성佛性으로부터 피어나는 고요와 안정의 꽃이다. 만일 내가 완벽하게, 고정불변으로 고요와 안정 상태가 되었다면 세상에서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게 있겠는가. 억만금이나 세상을 호령하는 권세가 이보다 낫겠는가. 이것이 천국, 극락, 구원, 깨달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붓다나 예수 같은 위대한 성자들이 우리들에게 내면으로 들어가라, 탕아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듯 본래, 본성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나는 느리고 깊은 들숨과 날숨을 한 호흡 씩 알아차리면서 내면으로 든다. 들판의 야생마처럼 거칠게 날뛰던 마음, 복잡하게 엉켜 있던 관념들은 헐거워져 무중력상태에서 힘을 잃고 유영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져도 답은 ‘모른다.’이다. 혹은, 내 이름이 뭐지? 나이는? 하고 물어도 대답할 자가 없다. 나중엔 물은 자도 없다. 호흡도, 손, 발의 위치와 느낌, 감각도 없다. 점 하나로도 남지 않는, 나도 너도 없고 보는 주체도, 보이는 대상도 없는 무주공처에서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아無我다. 마음을 초월했는데 누구의 과거가 존재하며, 과거가 없는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단 말인가. 미래도 없고 시간과 공간도 없다. 미움도 원망도 죄, 죄의식도, 성경도, 불경도 종교도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와중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는 어느 선승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된다.

    누구도 나에게 내가 누구인지, 내 참 자아에 대해 말해줄 수 없다. 오로지 스스로 경험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하고 깨달았다 해도 이것을 언어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단다. 그 참 자아는 실존적 ‘앎’이고 진리와 불이不二일 뿐 아니라 진리와 분리된 적이 없는 온전히 하나(One mind)라는 것이다.

    사실 아내는 탓이 없다. 탓 하자면 내가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한 나 자신을 탓해야 한다. 아내는 틀렸다고 판단 당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늘 습관처럼 판단을 선고하는 실수를 되풀이 한다. 이 지구 행성에서 해를 서쪽에서 뜨도록 바꿀 수 없듯이 나는 아내를 바꿀 수 없는 걸 아는데도 기대하고 또 희망한다. 이 세상의 원리는 아내에 대한 나의 반응이나 아내를 보는 내 각도만 바꾸도록 허용되었다. 사실 그렇게 하려면 세상과 아내를 초월해 온라인으로 마음의 우주에 드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우주인들의 경험담을 들으면 우주에서 태양은 내가 위치를 잡기에 따라 어느 방향에서든 뜨고 질 수 있거나 아예 뜨지도 지지도 않을 수 있단다. 우주에서는 좌, 우, 상, 하, 동서남북이 없다는 얘기 아닌가. 이 지구상의 도도한 이치라는 것들이 실은, 사람들이 기준을 정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안 만들고 정하지 않으면 이치도 의미도 없고, 그냥 아무 것도 아니다. 

    주중이면 나의 삼매도량인 뒷마당 잔디에서 하늘과 땅, 공기를 벗 삼아 내면으로 든다. 그러나 아내가 집에 있는 주말이면 동쪽 담 구석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로 숨어든다. 명상하는 남편이 현실의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히 입 다문 성자이길 바라는 아내를 충족시킬 자신이 없어서다. 그러나 아내는 알까? 우리의 다툼이 그 이상 커지지 않는 이유와 내가 내면에 들면 거기서 무슨 짓을 하는지를?

    나는 아내를 버린다. 아내와 세상과 내 과거, 미래와 생각들을 버린다. 생각을 놓을 때라야 나는 실존할 수 있다. 버렸던 아내가 명상 중에 불현 듯 나타나도 나는 ‘누구시더라?’ 시치미를 떼고 고요와 자유에 빠진다. 아내나 세상, 마음을 초월해 그 너머, 그 안에, 분리 없이 하나가 된다.

    그러나 명상이라는 온라인에서 현실이라는 오프라인으로 돌아오면 나는 아직도 힘들다.
    (끝)